- 이 글은 '북한이 중국의 지도 하에 개혁개방을 했다면' 이라는 전제하에 쓴 가상 시나리오임을 밝혀둡니다.
- 1989년 터진 중국의 천안문 사태를 참고했습니다(물론 진행 양상은 좀 다릅니다).
- 이 글은 인문사회 밸리에 올립니다(북한의 개혁개방 이후 벌어질 부작용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라 인문사회 쪽이 적절하다고 판단되므로).
1. 2049년 이전의 북한 - 긍정적인 부분
잘 알려진 대로 북한정권은 1948년 성립 이래 숙청, 세뇌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지금까지 폐쇄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며 나라 전체를 개인의 왕국으로 만들어 온 게 사실이지만 1990년대 이래의 경제파탄과 지독한 식량난으로 인해 그 체제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2023년 3월 말. 통일비용 공포에 시달리는 한국과 현상유지를 바라는 미국의 묵인하에 중국의 지지를 받은 실용파의 쿠데타로 200만 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4개월의 내전 끝에 김정은 정권이 붕괴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후 수립된 정부는 김정남 등 실용파, 개방파로 구성되고 집단지도체제를 운영하는 친중정권이었다.
(1) 특징
2023년 권력을 잡은 김정남 체제는 내부 혼란을 수습하고 북한 전역을 장악하는 데 2년 정도를 소요했으며 그 직후 제5차 당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여 다음과 같은 선언을 통해 '새로운 체제' 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는데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형태로 이뤄진다.
첫번째. 김일성 조선이라는 북한체제의 근간 자체는 그대로 유지된다. 이 체제에 도전하는 자들에 대한 처벌은 여전히 혹독했으며 단지 이전에 비해 중국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내부적으로도 반발을 고려하여 그 강도를 낮췄을 뿐이다.
두번째. 그러나 첫번째 기준을 유지한다는 전제 하에서는 인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유연한 통치를 한다. 물론 중국은 아예 김일성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중국식 공산체제를 원했던 모양이지만 그렇게 하면 대다수의 북한 기득권층 및 김씨 일가를 적대하여 북한 자체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했으므로 적당히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세번째. 남한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남한이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국교는 성립되지 않았지만 이를 통해 미-일과는 국교를 맺었다).
네번째. 핵무장을 포기하고(단 핵무장을 할 수 있는 시설과 인력은 유지) 과거 발행했던 차관을 갚는다(단 당장 전액을 갚을 수는 없는 만큼 중국이 일괄 구매하여 문제를 해결한 다음 나중에 북한이 중국에 원금과 소액의 이자만 지불하는 형태로 변경).
즉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 자체는 그대로 유지하되 자본주의 제도를 도입한 중국식 개혁개방 정책을 택한 것이다.
(2) 개혁 및 성장
사실 개혁의 형태는 특별히 참고할 만한 게 없다. 계급제도 철폐. 사회주의 정치시스템을 유지하는 선 안에서의 시장경제 실시 등 중국과 베트남 등에서 벌인 개혁개방정책을 벤치마킹하되 그 속도를 좀 더 높인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주민 통제가 약화될 경우 남한과의 통일을 희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 전에 생활수준을 높여 통일에 대한 기대를 줄일 필요가 있었으므로). 2025년부터 2030년까지는 나진 등 일부 특구를 설치해 시험삼아 운용하는 한편 1990년대 이래 30년 이상에 걸친 혼란 속에 완전히 무너진 국가 경제 기반을 다시 구축했으며 2031년부터는 일부 내륙 지방을 제외한 동서 해안 지역과 도시 대부분을 개방하고 본격적으로 경제성장에 착수하게 된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전과 달리 정권 차원에서 개혁개방을 보여주는 형태가 아닌 직접적인 정책으로 정하고 밀어붙인데다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중국 시장. 그리고 선진경제에 들어선 한국, 일본 시장까지 개척한 끝에 연간 10%~15%. 간혹 20% 이상의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고 2023년 500달러 안팎에 불과하던 북한의 GDP는 2030년까지 1500달러. 2040년까지는 5000달러. 2048년에는 16,000달러에 이르렀던 것이다.
물론 서방 선진국들의 국민소득이 기본 6~7만 달러에 이르고 남한은 80,000달러가 넘어가며 중국조차도 1인당 40,000달러의 국민소득을 이룬 상황에서 큰 돈이라고 보긴 어려웠지만 경제 정책의 변경 및 '세계의 시장' 중국을 활용한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북한 주민들은 사상 처음으로 절대빈곤에서 탈출했으며 경제 전체가 활력으로 가득 차 예전의 모습을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북한을 후원하여 영구분단을 추진하던 중국조차도 '이렇게까지' 올라갈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을 만큼 놀라운 성과였다.
2. 2049년 이전의 북한 - 부정적인 부분
그러나 '동아시아의 공장' 이라 불리며 전세계를 경악시킨 북한의 경제성장에 그림자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 시나리오의 주제인 '피로 물든 평양' 역시 이 그림자가 주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급속한, 그리고 제조업 위주의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은 북한 체제를 그 어느 나라보다 불평등한 사회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공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면개방이 아닌 특구 위주의 개방정책을 실시함으로써 해안과 일부 대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농촌 및 중소도시가 고도성장에서 소외되어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게다가 개혁개방 자체가 주민들의 자율을 상당부분 허용하는 것인지라 내부 통제력과 초기에는 말 그대로 절대적 지지를 보내던(세습독재정권의 횡포에 시달리다가 해방됐으니 당연하다) 주민들의 정권에 대한 충성심도 점차 약화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기 시작한다.
(1) 지역별 격차
김정남 체제 하의 북한은 이미 언급했듯이 부분적인 개혁개방을 선택했고 생산, 교통 등 모든 혜택이 이미 개발된 주요 특구에 집중되어 동서해얀 연해 도시와 평안도 지역 위주의 주요 개방구역, 공업 중심지역에 비해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일대의 발전은 현저하게 느려졌고 초기에는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었지만 고도 성장의 과실이 일부 지역에 집중되면서 결과적으로는 큰 폭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좋은 사례가 최초 개방 지역인 나진과 북한에서 가장 낙후된 곳 중 하나인 강원도(북측)인데 2048년 기준 나진 개방 특구의 1인당 국민소득은 무려 34,000달러에 달해 중국의 1인당 소득에 근접한 반면 강원도는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에 지나지 않아 전국 평균 16,000달러의 20%도 안 될 만큼 낙후되었다. 한마디로 북한 농촌 및 산간 지대는 붕괴 그 자체의 상황에 놓인 것이다. 게다가 개도국일수록 성장의 과실이 힘센 자에게 집중되게 마련인지라 개방 지역 내에서도 공장 노동자 및 농민공(북한의 경우에도 농촌 지역에서 탈출해 도시에서 돈을 벌려는 이들이 넘쳐나므로)들과 주요 재벌그룹의 기득권층 간의 소득 격차가 계속 심화되는 추세였다.
게다가 이건 언제까지나 '통계치' 였고 실질적인 체감수치는 더 심각한 수준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북한체제는 몇몇 평양 기득권층들을 빼면 상당히 평등한 편(물론 일반주민들이 가난한 쪽으로만 평등)이었고 지니계수가 0.3 정도에 머무른 것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방 이후 빈부격차는 심각할 정도로 심화되었고 제조업 국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0.5가 넘는 살인적인 지니계수가 만들어지게 된다. 한마디로 극소수 최상류층이 부를 독점했다는 이야기다. 평양 중심가나 변두리에서는 잇달아 고층 빌딩과 최상류층의 호화로운 주택이 세워지는 반면 그 사이의 구시가지. 즉 슬럼가에서는 하루 한끼도 먹기 어려운 극빈층이 제대로 먹지 못해 매일 몇십 명씩 굶어 죽고 병들어 죽는 곳이 북한이었다.
(2) 부패
게다가 이런 빈부격차에 따른 내부 불만에 불을 붙인 게 몇 가지 더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극심한 부패였다. 물론 김정은 등 개방정권 이전에도 부패는 심각했지만 지금의 부패는 경제규모의 성장에 따라 그 규모가 훨씬 커진데다 굉장히 악랄해졌다는 차이가 있다. 먹고살기 위해 장사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뇌물을 받아 먹거나 아니면 돈을 받고 국가 정보를 일부 유출하는 정도가 개방 이전의 부패였다면 이제는 돈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사회에 돈이 돌면서 이전에 비해 돈의 가치는 더욱 높아져갔고 이전에 비해 특권이 줄고 스스로 먹고살 필요성이 더욱 커진 노동당 출신 관료들은 말 그대로 상상 이상으로 썩어들어갔던 것이다.
게다가 북한의 경제적 매력이 높아진 2040년대 중반부터 이들 부패 관료들은 주민들에게만 받아먹던 뇌물을 이제는 외부에서도 받아먹었고 국제적인 항의까지 들어오기 시작했다. 북한 정권은 이런 부패를 막기 위해 2023년 김정은 체제 붕괴 이래 폐지되었던 공개총살 제도를 부활하고 2047년에는 김정남의 최측근에 해당하던 장민호(당시 43세) 인민무력부 부부장 등 여러 고위 관료들을 공개 총살하는 등 초강경 조치를 잇달아 내놓았으나 정권 자체가 거대한 부패 덩어리고 뇌물 없이는 사소한 것조차 해결하기 어려울 만큼 나라 전체가 썩은 상황에서 몇백명 처형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었다.
(3) 독재에 대한 반발
마지막으로 북한 체제가 개방을 하면서 주민들의 자율을 허용한 결과는 단기적인 안정 이후의 장기적 위협. 즉 중국과 같은 형태의 위기였다. 경제 발전과 자주, 자율의 문화가 사회 전반에 퍼지면서 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 자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간데다 불평등과 빈곤에 시달리던 대다수 서민층도 개혁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초기에는 단순한 경제정의, 정치개혁의 형태였으나 점차 서구식 민주주의의 도입 등 '북한 당국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형태' 로 이어졌다. 특히 김정은 체제 붕괴 이후 해외(한국 포함)로 망명했던 민주 인사 상당수가 귀환했는데 북한 당국은 처음에는 '체제의 관용' 을 핑계삼아 이들을 받아주었으나 이들이 점차 반정부, 반체제의 특성을 드러내면서 골머리를 썩게 된다. 2040년대부터 본격화된 반정부 세력들의 활동의 중심에 이들 탈북인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내부적으로도 개혁의 움직임이 끊이지 않았다. 덩샤오핑 체제가 처음에는 개방이라는 이름 하에 통합되었으나 점차 자오쯔양, 후야오방 등의 개혁파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로 분열되었듯이 김정남 체제 역시 김정남과 그를 지지하는 중국식 개혁파. 즉 보수파와 그 이상의 개혁을 요구하는 이정민, 김선화 등 진보파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3. 2049년 겨울. 개혁이 개혁을 밀어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어 마침내 폭발 직전에 이른 것이 2049년의 일이었다. 2040년대 중반 이래 진보파의 추가 개혁 요구가 갈수록 강해져가면서 김정남은 결국 자신이 예상한 사태가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애시당초 북한정권의 붕괴와 흡수통일을 막기 위해 선택한 중국식 개혁개방이고 그 결과 세습독재의 지속과 남한 주도 급속통일은 어떻게든 막았지만 그 대신 정권의 기반이 점진적으로, 좀 더 늦게 약화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덩샤오핑의 딜레마였다.
이제 김정남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진보파의 요구를 받아들여 체제개혁까지 추진하면서 민주주의 국가 북한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현재의 일당독재체제 및 왕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 부패 문제와 빈부격차 문제만을 개선할 뿐 나머지는 거절. 진보파를 때려잡고 기존의 개혁개방 노선을 유지할 것인가. 그리고 2049년 1월. 마침내 결단이 내려졌다. 제6차 당대표자회의를 개최한 김정남이 다음과 같이 선언한 것이다.
"지금의 김일성 조선을 기반으로 한 개방정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를 반대하고 반체제적인 급진적 오류를 범하는 자들을 일선에서 추방한다."
말 그대로 보수파의 개혁파 억압이었다. 개혁을 외치며 200만에 달하는 인명을 희생시켜 집권하고 북한 인민의 구원자로 자리매김한 김정남이 추가개혁을 요구하는 김선화, 이정민 등을 쫓아내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한 것이다. 당과 군의 보수세력들(주로 김정은 시절 온건 보수를 지향한 자들)도 가세하여 진보파는 일선에서 밀려났으며 진보 노선을 주도했던 총리 이정민은 당내 직책 박탈 및 가택 연금(당적은 유지)처분을 받았다. 이후 총리가 된 사람은 김정남의 양자인 김시영이었고 그는 개혁개방 노선을 철두철미하게 추종하는 보수파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보수파라 해서 현재의 문제에 대해 빠른 해결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고도성장의 부작용으로 물가는 빠른 속도로 오르며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고 통제 체제는 지식인과 학생들을 억압할 뿐이었다. 겉으로는 경제성장이 이어졌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썩을 대로 썩은데다 사회적 모순이 극에 달했고 이는 진보파를 숙청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4. 피로 물든 평양(2049년 6월)
(1) 대규모 시위(2049년 3월~5월)
2049년 3월. 김정남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중단 없는 개혁개방을 위해서는 지나친 개방을 주장하면서 공화국의 국체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한 통제도 필요하다' 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물론 과거로 되돌아간 건 아니었지만 경제적인 개방과는 별도로 정치적인 개방은 더 이상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북한의 안정을 바라는 중국의 지지도 한몫했다). 김일성 시절부터 강력한 통제력을 갖고 있던 사회안전부와 국가안전보위부가 직접 나서서 진보파 인사들을 잡아들이거나 가택 연금 조치하고 평양방어사령부 소속 10만 군대가 출동하여 시가지 전체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의 생각이 변한 상황에서 이런 조치는 큰 의미가 없었다. 지식인과 학생들, 노동자들의 주도 하에 평양과 각 지역의 도시들에서 시위가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2049년 4월에 이르러서는 수십만에 달하는 북한주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더 큰 개혁의 실시. 나아가 전면적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도입을 요구했다. 물론 계엄령 하에서 시위를 막기 위해 중요 인사들 대부분을 체포. 구금한 김정남이었으나 모든 인사를 감금할 수는 없었으며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시위를 모두 막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계엄령을 선포하기는 했으나 인민군을 풀어 시위대를 때려잡을 경우 국제적인 반발이 극심할 가능성이 높았는데 현재의 북한은 국제사회의 충실한 구성원 중 하나였으므로 이 점도 고려해야 했다.
그 결과 김정남은 계엄령 하에서 '확실한 진압 구실이 없는 이상 일단 내버려두라' 는 지시를 내린다. 아직까지 일반 주민들까지 시위를 적극 지지하지는 않는데다 유혈진압이 이뤄질 경우 국제사회가 반발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특히 고령화로 몰락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2030년대 초 바닥을 친 이래 이민인구 유입과 출산율 상승으로 고령화를 점차 극복해나가던(물론 기존의 고령화 인구는 어쩔 수 없어서 고령화 비율은 35% 정도로 여전히 높았지만) 한국이 '북한과의 급속 통합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 고 발표하면서 혼란을 부를 지도 모르는 유혈진압이라는 선택을 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2) 최종결정(2049년 5월 말)
그러나 물러서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던 게 당시의 현실이기도 했다. 처음에 어느 정도 풀어주고 부패 시정 등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알아서 해산하겠지라고 기대했던 보수파는 시위대의 요구가 단순한 개혁의 실시 등 사회적 모순에 대한 시정이 아니라 체제의 전면적인 개편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파악하고는 진압 외에는 방법이 없다며 김정남을 압박했고 중국 역시 '민주주의 체제가 구성되어 주민들이 전면적인 변화에 참여할 경우 한국과의 흡수통일 및 체제 붕괴가 불가피할 수도 있다' 고 말하면서 우회적으로나마 강경 진압에 지지를 보냈다.
게다가 국제 사회의 반응 역시 겉으로는 시위대에 공감했지만 각국 정부의 공식적인 행동은 한국, 미국, 러시아, 일본 등 몇 나라를 제외하면 '침묵' 그 자체였고 한국을 비롯해 북한 정권의 교체를 바라는 나라들도 이로 인해 대혼란이 벌어져 애써 안정화시킨 동아시아가 다시 헬게이트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간신히 고령화 문제를 극복해 나가고 국가 경제를 궤도에 진입시킨 상황에서 북한 급변사태가 벌어질 경우 입을 치명타를 두려워하여 정부차원에서는 흡수통일도 검토중이라고 발표했지만 북-중과의 내부 접촉에서는 '일단 현상유지로 가는 게 좋겠다' 는 이중적인 태도까지 보이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휴전선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지고 한국군 32만과 주한미군 2만 병력에 데프콘 3이 발령되는 등 급변사태 대비에 들어갔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김정남은 두 달 정도 침묵을 지키다가 국제 사회의 개입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확인하고는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게 된다. 어차피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1989년 동유럽 공산권 지도자들처럼 시위대의 요구대로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덩샤오핑처럼 시위대와 진보파를 때려잡고 권력을 유지하며 개발독재에 박차를 가할 것인가. 두번째를 택할 경우 중국의 비호 및 기존에 쌓아온 매력 덕택에 최악은 피하겠지만 상당기간 대외 이미지 약화 및 진보파의 결사저항을 감수해야 할 것이고 첫번째를 택할 경우 당장은 무사한다 쳐도 흡수통일로 이어져 김씨 왕조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2049년 5월 31일. 김정남 임시주석(김일성이 영원한 국가주석으로 지정되었기에 이후 승계하는 사람은 모두 김일성의 주석 권한을 위임받아 통치하는 임시주석이 된다)은 조선인민군 전체에 명령을 내렸다.
"전국에서 공화국의 최고존엄을 부정하는 폭도들을 진압하라. 저항하면 죽여도 상관없다."
(3) 피로 물든 평양(2049년 6월 1일)
2049년 6월 1일 오전 11시. 김정남이 진압을 최종 결정. 승인함에 따라 지금까지 시내를 포위하고 있던 평양방어사령부 소속 99식A2 전차가 평양 혁명 광장에 나타나 시위대를 압박했고 그 뒤에서는 확성기로 해산 명령이 내려졌다.
"폭도들은 투항하라! 투항하지 않을 경우 사살된다고 하더라도 항의할 수 없다!" - 평양방위사령부
그러나 진압 쪽으로 방침이 정해졌음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도 남은 수만의 시위대가 물러설 리는 없었다. 시위대는 '정당한 시민의 요구를 물리치지 말라.' 고 주장하면서 해산을 거부했고 그 직후 바로 발포가 시작됐다. 전차부대를 앞세워 시위대를 깔아뭉개고 저항하는 시민들을 향해서는 평양방위사령부 소속 인민군 병사들의 소총이 불을 뿜었다. 김정남이 이미 살인 면허를 부여한 이상, 그리고 북한 최고 기득권층인 이들의 특성상 살인에는 주저함이 없었고 광장은 순식간에 수천 명에 이르는 시위대 사망자와 부상자로 가득찬 피바다로 변해갔다. 국제 사회가 보는 앞에서 '시위대를 학살' 한 것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인민군은 혁명 광장에 집결한 시위대에게 세 번에 걸쳐 투항을 권고한 다음 바로 사격을 개시했다. 보통 군이 시위를 진압한다고 해도 시위대가 무장하여 군에 대한 살상능력을 갖추지 않은 이상 비살상 무기를 사용함이 원칙임에도 인민군은 전차부대를 앞세워 시위대를 적군을 제압하는 양 깔아뭉개고 도망가는 시위대에게는 전차에 거치된 기관총탄과 전차와 동행하는 보병들의 소총탄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광장 전체가 시위대의 시신과 부상자가 흘리는 피로 가득찼으며 그 중에는 여자나 어린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뒤이어 지방 각지에서도 유혈진압이 진행되었다. 마지막 투항 권고를 한 다음 투항하거나 해산한 시위대는 그나마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무자비한 진압이 이뤄졌고 특히 무기를 들고 저항한 일부 과격 시위대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철저한 '말살 작전' 에 걸려 말 그대로 생존자가 거의 없을 정도의 참혹한 꼴을 당해야 했다. 설사 조용히 해산한다고 해도 지도부급은 대부분 사형. 단순가담자를 제외한 시위대 주요 인사들이 중형을 언도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말 그대로 북한판 천안문 사건이었다.
또한 김정남은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당내 진보세력을 철저하게 숙청했는데, 기존에 당적 유지는 허용받았던 이정민의 경우 시위대의 정신적 지주라는 이유로 정치범으로 몰려 1급 정치범만 수용된다는 청진 25호 관리소로 끌려가 그 곳에서 죽었고 김선화 역시 목숨은 건졌으나 당적을 박탈당하고 가족 전체가 갑산으로 쫓겨났다(가족들은 다음해 평양으로 돌아왔으나 김선화는 갑산에서 일생을 마친다). 그 외의 진보세력들도 대부분 가혹한 처벌을 받고 노동당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4) 인명피해
정확한 인명피해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나마 국제사회가 어느 정도 감시할 수 있었던 평양 등 주요 도시의 인명피해는 최소 3천여 명에서 많게는 1만 명까지 집계되어 있으나 이쪽은 북한 당국이 어느 정도 국제사회의 눈치를 봐서 진압 강도를 조절한 곳이고 지방에서는 정말 국민을 적으로 삼는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가혹한 진압이 이뤄졌기에(특히 몇몇 지방 소도시는 도시 전체가 말 그대로 피바다로 변했다)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인명피해는 사망 및 실종 3~5만 명에 부상자 10만 명 이상 등 도합 15만여 명이다. 게다가 이후 3,000여 명이 정치범 등으로 몰려 처형되거나 중형을 받았고 부상자 중에서도 중상을 입고 방치되다가 사망한 이들이 많아 실제 희생자 수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한편 휴전선에서도 상당한 인명피해가 발생했는데 발포를 거부하고 탈영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려 한 일부 인민군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 전투는 휴전선 이남까지 확대되어 여러 전선에서 대규모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한국군 13명. 인민군 300여 명이 전사했으며 한국군 47명. 인민군 8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의도적인 도발은 아니기에 국제 문제는 되지 않고 북한측의 사과 및 배상조치로 마무리).
5. 이후
서방 국가들은 이 사건 직후 북한 정권을 강력 규탄했고 주요 서방 국가들의 도시에서는 북한의 반인륜적 만행을 비난하는 시위가 열렸다. 그러나 북한의 주요 무역 대상인 중국은 침묵했고 대부분 서방 국가들 역시 북한 시장이라는 매력을 민주주의를 이유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제재는 형식적인 수준에 그쳐 일시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던 북한은 다음해인 2050년부터 다시 플러스 성장을 이어가고 2060년에는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돌파. 중진국에 공식 진입하고 대규모 중산층이 등장하는 등 고도성장을 지속하게 된다. 또한 김정남은 '북한의 덩샤오핑' 이라는 평가답게 이 사건에도 불구하고 '개혁개방 조치는 변함이 없음' 을 분명히 하고 일부 개혁의 중단을 요구하는 보수파를 설득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신임을 얻었다.
한편 진보파는 불법화되는데 과격파는 정권 내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탈북하여 해외로 망명. 반정부 활동을 계속하거나 지하로 숨어들게 된다. 일부 남은 온건 진보파 역시 주민들과의 괴리(지식인, 학생 위주의 구성) 및 대안 부재가 실패의 원인임을 뼈저리게 깨닫고 북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여 민심을 얻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하여 이후에는 제도권 내에서 합법적인. 가급적 정부를 자극하지 않는 형태의 부정부패 시정 및 주민들의 참여도 향상 등의 개혁 요구, 중국 의존도 감소 요구 중심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물론 이들이 민주화 투쟁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현실을 어느 정도 인정한 셈이다.
어쨌거나 2049년 6월 1일 벌어진 '평양 사태' 는 북한판 천안문 사태로써 개혁개방 및 고도성장의 부작용. 민주주의. 그리고 지나친 중국 의존(시위대의 요구 중에는 지나친 중국 경제 의존도를 낮춰 중국의 횡포에서 벗어나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에 대해 북한 당국과 국제사회가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s 후문
- 평양 사태 당시 미국은 북한 내 진보/보수파 간의 내전 발발 및 그 여파가 한국에 미칠 것을 우려하여 데프콘 2 발령을 중심으로 한 전쟁 대비 태세를 갖출 것을 권했으나 초고령화로 인해 2048년 기준 GDP의 80%가 넘어갈 만큼 극심한 재정적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한국 정부는 전쟁 상태 돌입 자체만으로도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시기 한국의 고령화 비율(만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이민인구 유입과 뒤늦은 출산율 증가(2012년 1.20에서 2048년 1.35)로 최악은 피했으나 여전히 35%에 달할 만큼 높았고 게다가 빠른 고령화 속도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탓에 노인 빈곤도 다른 선진국보다 심각했다.
- 김정남은 이 사건이 터지고 3년 뒤인 2052년 죽을 때까지 '평양 사태' 는 '반혁명세력의 반체제적인 행태로부터 체제 최고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 였다며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했으며 이는 현재도 유지되는 북한정권의 공식 입장이다. 다만 이런 입장과는 별도로 평양 사태 직후 부정부패 문제에 전면 개입하는 한편 빈부격차를 개선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고 한다. 반체제 세력이 힘을 얻은 게 극심한 불평등 때문임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부패와의 전쟁은 드러난 자들. 지나치게 해먹은 자들만 엄벌하고 나머지는 모른척하는 형태여서 실제 개선된 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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